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케패스 전투 (문단 편집) == 상세 == 가장 치열한 전투이자 당시 구정공세이후 유일하게 연합군이 선전하여 전과를 냈던 전투이다...라는 것이 공식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가장 많이 사상당한 전투'''이다. 인터넷 뒤져보면 안케패스 작전 당시에 한국군의 수많은 삽질과 군 수뇌부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한 참전용사들의 글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전투이다. 가장 최악의 지휘로는 1대대가 하도 고지에서 총알이 쏟아져서 진격이 힘들자 드럼통에 흙을 채워 굴리면서 밀고 올라가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군대는 까라면 까는 것이어서 흙으로 채운 드럼통이 현장에 투입되긴 했는데 밀고 올라가긴 커녕 굴러 내려오는 상황이 발생하자 현장 지휘관이 곧장 그만 두었다. 참전용사들이 이정도로 심하게 비난하는 전투는 안케패스 전투외에는 거의 찾기 힘들다. 한마디로 한국군 최악의 졸전으로 알려진 [[짜빈박 전투]]보다 더 많이 죽었다. 1972년 한해 동안 발생한 한국군 전사자는 448명(순직 등을 포함한 전체 사망자는 513명)임으로 단일 교전에서 그 해 사상자의 16%가 발생한 것으로 결코 작은 피해가 아니었다. '안케패스 작전'하면 지역내에 638고지에서 있던 전투가 전부로 오인되어 양자를 헷갈려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안케패스 작전'의 일부가 638고지 전투이자 가장 중요한 작전이며 대부분의 피해가 나온 전투이다. 작전 자체가 기갑연대 1중대 관할인 638고지에 숨어든 적군이, 1중대를 기습하자 우발적으로 일어난 작전이 바로 안케패스 작전이다. 당시 참전용사들은 '안케패스 전투'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이 638 고지 전투를 생각한다. 인터넷 참전 수기에서 '안케패스 전투'라고 하면 638고지와 무명고지 전투가 주로 다뤄진다. 그에 비해 19번 도로를 개통하기 위해 3대대 치른 전투는 앞선 전투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 안케패스 작전 전체 참전부대 * 한국군(ROK): 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 기갑연대(1~11중대[* 12중대는 독립중대로 따로 있었다.], 수색중대, 전투지원중대) 1,400명 -맹호 사단장 정득만 소장, 기갑연대장 김창열 대령 * 배속: 1연대 수색(114명)/8중대(95명), 26연대 2중대/ 사단 장갑중대/ 사단 공병1중대, 3중대/ 사단 61포병대대 1, 2포대, 628 포병대대 3포대 * 미군(US): 공군 제7공군. 129 헬기중대, 180 헬기중대, 21환자후송중대 * 남베트남군(ARVN): 육군 2군단 22사단 44/47연대 * 북베트남군(NVA): 육군 3사단 12연대/ 지역 VC 2,280명 * 전과: 사살 680명, 노획화기 77정 * 피해: 전사 63명, 부상 96명 * 638고지 전투 참전부대 * 작전기간: 1972년 4월 11일 ~ 24일 (14일) * 한국군(ROK): 기갑연대 1대대 1/2/3/4, 배속 9/수색중대, 1연대 8중대 - 총 7개 중대 * 적군: 단대호 미상 1 개중대(-) 또는 1개 소대(+) * 전과: 공식 사살 436명(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음), 무기 노획 36정, 목표 점령시 포살체 4구 확인 * 피해: 사망 39명, 부상 51명 사상자 교환비는 이번에도 한국군 전사 75명 대 베트남군 전사 700 명으로 압도적인 교환비를 내기는 했다. 9대1에 이르는 교환비인데, 75명이 축소되었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기는 하나 이조차도 최대 150명 가량으로 본다. 그러나 '''문제는 월맹군 전사자 700명은 실제로 발견한 적군 시신과 노획한 화기 숫자를 감안하면 다소 과장되었다는 것이 전사 연구자들의 공통된 입장이며 이는 당시 작전에 투입된던 인원들의 증언에서도 꾸준히 반복되었다. 양자를 비교하면 알겠지만 안케패스 작전에 참가한 16개 중대중에서 7개 중대가 638고지 전투에 참가했으며, 적 사살, 노획화기, 아군 피해의 절반 이상이 638 고지에서 나왔다. 638 고지 전투를 요약 하자면 한국군 1개 소대가 1971년 8월 폐쇠한 638고지 상의 진지를 규모 미상의 적군이 점령 하였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 한국군 7개 중대가 공격했다가 큰 피해를 입은 전투이다. 특히 공격의 선봉을 담당한 1연대 8중대의 경우 95명중에서 전사 17명(중대장 김용강 대위 포함), 부상 30명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24일, 1대대 4중대가 대신 진격해보니 적은 이미 다 철수한 상태로 진지에는 적 시신 4구만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안케패스 전투는 638고지 전투, 무명고지 전투, 19번 도로 개통 작전으로 총 3개의 전투가 동시에 일어났으며 이는 춘계대공세간 월남군 2군단에 대한 보급 차단으로 월맹군의 공세 여건 보장을 위해 실시된 것이다. 당시 적은 사전 638고지를 점령한 인원을 포함해 그 일대에 연대급 제대를 투입하였기에 700여명의 사살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애초에 안케패스 전투는 638고지라는 한정된 위치에서 발생한 교전이 아닌 7.5km에 달하는 19번 도로 축선을 끼고 진행된 작전이었다. 다만 전과가 전반적으로 과장되었으며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할 수 있다. 주월한국군의 사상 첫 정규전이었으며 최악의 피해를 입은 만큼 수많은 훈장이 수훈되었다. 최고의 훈장인 태극 무공 훈장만 2명 받았고 (2중대 1소대장 고 임동춘 중위, 4중대 3소대장 이무표 중위), 졸렬한 지휘를 하여 푸짐하게 욕들어 먹은 연대장 김창렬 연대장을 포함하여 4명에게 을지 무공훈장, 충무 무공훈장 6명, 화랑 무공훈장 13명, 인헌 무공훈장 약간 등 50여명에게 훈장이 쏟아 졌다. * 한국군 상황 1번 국도에 해당하는 19번 도로는 당시 내륙에 있던 자유월남군 2군단의 핵심이자 유일한 보급로 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지였고 당시 한국군은 19번 도로를 확보하려고 했다. 원래는 미군 1기병사단 주둔하던 지역이었으나 1970년 7월에 미군이 철수하면서 한국군 맹호사단 기갑연대 1중대가 인수하여 경계를 하였다. 안케패스는 약 7.5km에 달하는 19번 도로이다. 이를 서쪽부터 638 고지에 1중대 1소대가 지키고, 240고지에 2소대, 168고지에 3소대가 있었다. 중대 본부는 638 고지 북쪽 500m(직선거리 275m) 능선의 600고지에 있었다. 그러다 1소대는 638 고지를 버려두고 1중대 본부(화기소대 포함)로 이동한다. 이때 주둔하던 소대 전술 기지를 원상복구 시키지 않고 참호, 교통호는 물론 각종 건설자재를 그대로 방치 시켜 놓는다. 1971년 11월 19일에 부임한 맹호 사단장 정득만 소장은 적 박격포 사정거리를 고려하여 "기지 주변2킬로 미터 이내를 매일 반복 수색 하라"라고 지시를 내리며 이는 일일 수색 계획으로 매일 사단에 보고 되었다. 그런데 1중대는 이를 보고만 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특히 72년 3월 중순 638 고지를 적군이 점령해서 진지를 구축하는데 20일간 모르고 있었다.[* 1중대원들이 매일밤 638고지에 매복을 나가야 하는데, 철군등 때문에 매복/정찰을 나가지 않았다는 수기도 있다.] 4월에는 중대장이 교체되었는데 후임 중대장인 김종식 대위도 계속 허위보고만 일삼았다. * 북베트남군 상황 구정공세 이후 대대적으로 시작된 북베트남 정규군의 춘계대공세로 직접 남하하여 전방지역에 대한 장악을 위해서 시작하여 내륙에 있던 월남군 2군단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공세적인 작전을 위한 연대급 이상의 작전을 펼치게 된다. 북베트남군으로서는 남베트남(자유월남)군 2군단을 포위하려면 반드시 수행해야하는 작전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